[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가을을 향하여
가을을 향하여 아프다 가을의 길목에는 아프다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은 지나고 울고 서 있는 나무, 다가설 수 없는 갈대숲, 가벼워지는 가지들이여 우리는 모른다 잎새 떨군 가지마다 붉게 맺힌 열매를 아프다 가을의 길목에는 늘 아프다 제 목을 꺾는 꽃들이며 비에 젖어 바람에 떨던 숲의 울음을 기억하라 깎이고 패인 생멸의 시간 차라리 아름답다 말하고 싶다 들리는가 중후한 저음의 저 들판의 소리가 아프다 가을의 길목에는 늘 아프다 붉어지는 먼동에 피어나는 하루 어둠 속 살아나는 숨 소리 아무도 모른다 바람이 불어오고 갈대가 눕는 언덕 위로 어둠을 갈아입는 저 산들 겸허한 순종의 무릎들 무거웠던 겉옷을 벗어 버리고 붉게 토하는 서러움 담아 그리웠다고 말하자 보고 싶다고 말하자 붉게 토하는 가을을 향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입니다.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집을 나섭니다. 몇번이나 나에게 다짐했던 약속이었습니다. 막 동이 틀 무렵 길 건너 저 언덕에 오르리라. 그러기 위해선 어두울 때 길을 떠나야 합니다. 게으름에 때를 놓쳐 훤하게 밝은 언덕에 오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곳에 올라 붉은 나무숲을 밀쳐내며 오르는 해를 보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내 안에 자라고 있는 희망과 수고와 번민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깊은 이해로부터, 깊은 사랑으로부터, 깊은 감사로부터, 깊은 기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건 고난을 피해 가는 나에게 익숙해 질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삶은 관심이요. 얽어 매는 것이 아니라 부요하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계절이 짙어가는 하늘은 높고 숲은 아름다운 색깔을 품어내기 시작 했습니다. 모든 날의 주인은 당신이기에 나의 하루는 어김없이 당신 앞에서 깨어나고 저물어 갑니다. 잎을 모두 떨군 나무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가을. 촛불 하나 흔들리는 애처러운 가을 어스름입니다. 붉게 물든 단풍 아래 번지는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발자국 밑에 쌓여가는 낙엽만큼 삶의 두께가 두터워짐을 실감합니다. 나희덕 시인의 ‘푸른밤’을 읇조리며 푸른밤을 걸어갑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 그 무수한 길도 /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 내 응시에 맑은 별은 /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내가 걷는 수만의 길은 오로지 먼 길을 돌아 당신에게로 향한 한 길 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길 위에 있습니다. 그 길이 언제 끝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 길 어딘가에 흔들리는 나의 걸음을 지긋이 바라보는 당신에게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오늘도 나는 그 길을 갑니다. (시인, 화가) Nathan Park•Kevin Rho 기자